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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는 죽음과 감추지 않는 주저흔 [이문열 세계명작산책_2권 죽음의 미학_킬리만자로의 눈]

신이 없는 죽음과 감추지 않는 주저흔 [이문열 세계명작산책_2권 죽음의 미학_킬리만자로의 눈]

“킬리만자로는 6,008미터 높이(탄자니아 국립공원 측이 공식적으로 공개한 산의 높이는 5,895미터이다-옮긴이)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한다. 그 산의 서쪽 정상은 마사이족의 말로 ‘누가예 누가이’라 불리는데, 이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서쪽 정상 가까이에는 미라 상태로 얼어붙은 표범의 사체가 하나 있다. 그런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얼 찾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부정이란 의미를 갖지만 신이 있을 때와 신이 없을 때 그 부정의 강도는 달라집니다. 신이 있는 죽음은 약속된 다음 세상이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많이 줄여주고 극단의 경우에는 스스로 다가가려는 열망까지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이 없는 죽음, 허무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는 죽음은 오직 삶의 부정으로만 나타나게 됩니다.

「킬리만자로의 눈」이 보여주는 죽음은 신이 없는 죽음입니다. 주인공 해리에게 죽음은 살아있던 소중한 시간 속 하고 싶었던 일을 못하게 되는 상태, 일찍이 애착했던 세계와의 원치 않는 이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죽음에 수반되기 마련인 고통은 죽음을 더욱 두렵고 혐오스런 그 무엇으로 느끼게 합니다.

고통이 아직 적극적으로 그 양상을 드러내기 전에는 죽음 뒤의 허무가 그를 괴롭힙니다. 그가 쓰려고 했던 글들을 아쉽게 되씹어보는 것도 어찌 보면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지 못한  채 낭비된 삶을 살았던 시간을 후회하는 듯하지만 실은 죽음 뒤의 허무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입니다.

“충분히 이해하게 돼서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쓰지 않고 아껴두었던 것들을 이제 그는 결코 글로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잘 써보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쓸 능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쓰기 시작하길 계속 미루고 지연시켜왔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이제 어떤 쪽이 사실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죽음은 고통 때문에 더 혐오스럽고 두려운 것으로 변해갑니다. 고통과 관련된 여러 체험과 소중한 기억들을 그가 되돌아보기 시작하는 것은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들면서 점점 더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통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제 죽음은 고통과의 투쟁이란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 1952년에 개봉한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 그레고리 펙 주연

흉기로 자살한 이들에게는 흔히 주저흔躊躇痕이란 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죽음을 망설이느라 단번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 못해 사인과 무관하게 남게 되는 상처입니다. 스스로 다가가는 죽음도 그럴진대 원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 죽음이야 오죽할까요.

하지만 고귀한 정신에게 그 주저흔은 수치가 됩니다. 소설의 이상적 주인공들도 대개는 주저흔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킬리만자로의 눈」은 오히려 고통을 주된 원인으로 한 주인공의 주저흔을 감추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해리의 불평과 분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주인공 해리를 죽음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고통입니다. 자기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위로를 찾던 그는 마침내 삶조차도 고통과의 투쟁이며 죽음은 바로 그 괴로운 투쟁을 끝내게 해주는 어떤 상태로 받아들여 꼴사나운 저항 없이 죽어가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이 없고 약속된 다음 세상도 없는 정신이, 그러나 건강하고 용감한 정신이 찾아낼 수 있는 죽음과의 친화 방식 중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이젠 그 일을 끝낼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술을 마시면 되니 안되니 티격태격 싸우다가 끝나는 것이다. 오른쪽 다리가 썩어들어가기 시작한 다음부터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고통이 사라지자 공포감마저 사라졌다. 이제 그가 느끼는 거라고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예감에서 오는 극심한 피로감과 분노뿐이었다. 이제 그를 향해 다가오는 그것에 대해 그의 마음에는 그 어떤 호기심도 일지 않았다. 수년 동안 그 문제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지만, 이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피로가 지나치면 죽음조차도 얼마나 쉽게 무의미한 것이 되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 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등으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있는 작가입니다. 일생 행동과 예술, 육체와 정신의 조회를 추구하며 쓰고 사랑하다 죽어간 가장 미국적인 작가입니다. 그는 예순둘에 엽총으로 작품 목록만큼이나 다양했던 삶을 스스로 마감했는데 그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 킬리만자로산 서쪽 정상에 얼어붙은 시체로 남아 있는 표범이 거기서 무얼 찾고 있었는가처럼, 그가 무엇 때문에 엽총의 총구를 입에 물었는지 완전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 책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권 – 죽음의 미학_킬리만자로의 눈」는

1996년 처음 출간된 이래 20여 년간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이 새로운 판형과 현대적인 번역으로 다시 독자를 만납니다. 그간 변화해온 시대와 달라진 독서 지형을 반영해, 기존에 수록된 백여 편의 중단편 중 열두 편을 다른 작가 혹은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교체하고, 일본어 중역이 포함된 낡은 번역도 새로운 세대의 번역자들의 원전 번역으로 바꾸어 보다 현대적인 책으로 엮었습니다. 바뀌거나 더해진 것이 3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새로워진 개정판입니다.

엮은이인 이문열 작가는 초판 서문에서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속에 다양하면서도 잘 정리된 전범(典範)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 작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작품들의 목록을 추리고, 주제별로 세계의 다양한 나라의 작품들을 엮어내고 각 작품에 대한 해설까지 더했습니다. 모두를 납득시킬 만한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는 별수 없는 미진함이 남을지라도(혹은 그런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작가는 이 선집이 작가 자신의 문학 체험의 한 결산임을 분명히 밝히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학 체험이 독자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은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창작의 한 전범이자 기준이 될 것이며, 소설 연구자들에게는 주제별 비교가 가능한 텍스트로서, 그리고 대중 독자들에게는 수준 높은 세계명작들의 풍성한 세계를 접하는 첫 책으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수록된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높은 수준의 문학 교양을 쌓는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총 10권으로 기획된 시리즈 중 우선 1권과 2권이 동시 출간됐습니다. 2권 “죽음의 미학”은 죽음을 주제로 한 중단편 9편을 모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닥쳐오는 죽음은 우리 모두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죽음은 삶을 삶답게 하는 전제가 됩니다.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다만 모두에게 다른 것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러를 것인가, 예비하고 다가갈 것인가, 혐오하고 두려워할 것인가, 할 수 있는 한 기피할 것인가. 우리 삶의 무수한 선택이 죽음에 대한 이 선택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소설은 자주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워 삶을 이야기합니다. 2권에 수록된 9편의 중단편을 통해 문학이 다루는 “죽음의 미학”을 살펴보는 것은 인간 삶의 가장 본질적인 순간들을 체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에피소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우리는 해리의 죽음을 앞둔 상황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살펴 보며, 인생에서 살아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작가의 의도를 해석해볼 수 있는 부분은, 해리의 마지막 꿈입니다. 자신을 구조하러 오는 비행기를 타고 구조되는 꿈을 꾸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비행기의 종착지가 킬리만자로의 정상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본인의 죽음을 예견합니다. 구조가 된다는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로써 다가오는 느낌이지만, 그에 대한 결과가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들이 흔히 죽음을 통해 해탈 혹은 어떤 경지에 이른다 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한 번씩 볼 수 있는데, 아마 헤밍웨이의 경우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엽총 자살로 마무리하게 된 그를 생각해보면 삶 속에서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기 전 우리는 삶을 열심히 살며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고,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헤밍웨이와 해리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택할까요? 아님 계속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게 될까요? 독자 여러분들도 한 번 본인의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책을 읽는 묘미 중 한 가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들며 이만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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