슌킨은 부유한 약재상 집안 아가씨, 사스케는 거래처에서 온 가게 수습생이다. 덧붙이자면 슌킨은 아홉 살에 시력을 잃었지만 고토와 샤미센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부유한 집안 형편과 음악적 재능, 미모가 ‘선물’이었다면, 실명은 그녀의 삶을 뒤틀어버린 재앙이었을 테다. 반면 사스케는 형편이 넉넉치 않은 상인 집안에서 거래처에 위탁된 견습생, 당시 가게를 물려받는 장남 외엔 일정 시기 독립해야 하는 에도시대 관습으로는 사실상 ‘머슴살이’ 신세다. 결과적으로는 고토 명인으로 성장하지만, 이는 슌킨과 짝지어주려는 주인집의 도움이 컸다. 다시 말해 시작은 그저 건강한 몸, 멀쩡한 눈, 순종적인 성품 정도가 장점의 전부였을 테다.
“슌킨보다 네 살 많은 사스케는 열세 살 때 처음 이 집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가 바로 슌킨이 아홉 살 된 해로, 슌킨의 아름다운 눈은 영원히 닫힌 뒤였다. 사스케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슌킨의 눈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만일 슌킨의 실명 전 얼굴을 보았더라면 실명한 그녀의 얼굴이 불완전하다고 느껴졌을 테지만, 다행히 그는 그녀의 용모에서 무엇 하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처음부터 완벽한 얼굴로 보였다.” (p94)
“훗날 사스케는 슌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동정이나 연민으로 비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렇게 보는 사람이 있으면 천만의 이야기라고 부인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스승님의 얼굴을 보고 가엽다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네. 스승님에 비한다면 도리어 눈이 보이는 쪽이 더 비참하지. 스승님께서 저 기상과 용모로 무엇이 아쉬워 남의 동정을 구하시겠는가? 오히려 ‘사스케가 가여워’라고 하시며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어. 나나 너희는 눈코가 있을 뿐, 다른 것은 무엇 하나 스승님께 미치지 못한다. 우리들이야말로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p96)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은 고토를 배우러 다니는 슌킨을 사스케가 수행하면서다. 시력을 잃어 불편했지만 동정심 같은 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던 슌킨을 한결같이 동경해온 사스케의 진심이 느껴졌을 수 있다. 이후 사스케가 몰래 고토를 배우다 들키자 슌킨이 본격적으로 가르치기를 자청하며 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슌킨전』에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로 그때 슌킨은 사스케의 뜻을 갸륵하게 여겨, ‘너의 열정이 기특하니 앞으로는 내가 가르쳐주마. 틈이 나면 언제고 나를 스승으로 의지하여 연습에 힘쓰도록 하라’고 말했고, 슌킨의 아버지 야스자에몬도 마침내 이를 허락했다. 사스케는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마음으로 수습 업무를 보는 한편,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 슌킨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열한 살 소녀와 열다섯 살 소년은 주종 관계에 이어 이제 또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p107)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는 가끔 마음 내킬 때마다 사스케를 2층 마루로 불러 가르쳤는데, 그것이 마침내는 하루도 거르지 않게 되었다. 아홉 시, 열 시가 되어도 여전히 사스케를 놓아주지 않고 “사스케!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안 돼, 안 돼! 제대로 켤 때까지 밤을 새우더라도 해”라며 엄격하게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려 아래층의 점원들을 놀라게 했다. 때로는 어린 여스승이 “바보야, 왜 못 외우는 거야?”라고 큰 소리로 혼을 내며 머리를 때리면 그 제자가 훌쩍거리며 우는 일도 드물지는 않았다.” (p110)
모두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슌킨의 가르침은 혹독했다. 사실 당시 예인들의 세계에서 사제지간의 혹독한 훈육과 체벌은 흔한 일이었다. 사스케는 이를 당연한 듯 받아들였지만, 훗날 슌킨의 다소 잔혹할 만큼 엄격한 교습방식은 스스로에게 큰 화를 부르게 된다.
“게다가 다마지로를 때린 다마조도 일찍이 자신의 스승 긴시金四에게 주로베에 인형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 이때 부서진 인형이 그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그는 피범벅이 된 채 부러져나간 인형 다리를 스승에게 간청해 얻어다가 풀솜으로 싼 후 맨 나무 상자에 넣어두고 때때로 꺼내서는 어머니의 영전에 큰절하듯 예를 올리곤 했다. “이 인형으로 혼쭐이 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지극히 평범한 예인藝人로 끝났을지도 모른다”라고 이따금 울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p112~113)
“어떤 사람은 “남자 스승이 제자를 엄하게 꾸짖는 예는 많지만, 슌킨처럼 여자가 남자 제자를 때리거나 야단치는 경우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오. 어찌 보면 슌킨이 어느 정도 가학적 기질이 있었던 것은 아닐지, 교습을 빙자하여 일종의 변태스러운 성욕적 쾌락을 즐겼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p113)
슌킨은 사스케와의 남녀 관계를 자존심 상해하며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 아이가 생기며 공공연한 사실이 된다.
““그런 이야기는 듣기도 싫어요. 작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스케 따위와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요. 저를 딱하게 생각해주시는 것은 송구하지만, 제가 아무리 불편한 몸이라고 해도 아랫것을 남편으로 맞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배 속의 아이 아버지에게도 미안한 일이에요.”” (p122~123)
“어째서 슌킨은 사스케를 그런 식으로 대했을까. 오사카는 오늘날에도 혼례를 치를 때 자산이나 격식을 운운하는 것이 도쿄 이상인 곳이다. 더구나 예로부터 상인들의 식견이 높았던 지역이니 그 봉건적 풍습은 가히 상상 이상이리라. 따라서 오랜 전통이 있는 집안의 여식으로서 긍지를 버리지 않은 슌킨 같은 여인이 대대로 고용살이한 집안 출신인 사스케를 낮추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 맹인의 비뚤어진 마음도 있어 다른 사람에게 약하게 보이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투지마저 불타올랐을 것이리라. 그러니 사스케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것은 완전히 자신을 모욕하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았을 때 아랫사람과 육체적인 연을 맺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그 반동으로 더욱 쌀쌀맞게 대했을 것이리라.” (p125)
앞서 슌킨의 괴팍함과 사치스러움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그녀는 모든 것을 사스케에게 의지했다. 그 결벽증과 사치스러움은 대단했다. 특히 휘파람새와 종달새를 키우는 게 특히 그랬다. 당시 1만엔이 넘는 휘파람새였으니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제자가 월사금과 선물에 소홀하면 가차없이 그만두게 했고, 하인들의 먹는 것까지도 간섭할 지경으로 인색했다.
“『슌킨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데루의 이야기에 의하면, 슌킨은 볼일을 보고 나서도 손을 씻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볼일을 볼 때도 하나부터 열까지 사스케가 다 해주었기에 자신의 손을 전혀 쓰지 않았다. 고귀한 부인은 목욕할 때도 아무렇지 않게 남에게 몸을 맡기면서도 수치심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데, 슌킨도 사스케에게는 그런 고귀한 부인과 다를 바 없었다.” (p127)
“그래서 화장에 보통 몰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휘파람새를 기르면서 그 배설물을 쌀겨와 섞어 사용했고 또 수세미에서 짜낸 물을 아껴두고 바르며 얼굴과 손발에 윤기가 흐르지 않으면 언짢아했는데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p128~129)
“슌킨의 집에는 주인 한 사람에 고용인이 대여섯이나 되어 다달이 들어가는 생활비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왜 그렇게 돈과 일손이 필요했느냐 하면, 첫 번째 원인은 작은 새를 기르는 취미에 있었다. 특히 그녀는 휘파람새를 사랑했다.” (p132)
앞서 얘기했듯 슌킨의 가학적이기까지 한 교습방식은 결국 그녀의 나이 37세에 자신을 망치는 화를 불렀다. 어느 밤 잠입한 괴한이 뜨거운 물을 한 주전자를 슌킨의 얼굴에 끼얹고 도망갔고, 때문에 화상으로 짓무른 피부가 가라앉기까지 두 달 이상 걸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는다.
“사스케는 하녀들의 방에 들어가 그녀들이 쓰는 경대와 바늘을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이부자리 위에 정좌한 채 거울을 보며 자기 눈의 중앙을 바늘로 찔렀다.” (p162)
“사스케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안방으로 가서는 “스승님! 저도 맹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평생 스승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고 그녀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스케, 그게 정말이냐?” 하고 묻고서 슌킨은 긴 시간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사스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평생 동안 이 침묵의 몇 분간만큼 즐거운 시간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p163)
““잘 결심해주었구나.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누구의 원한을 사서 이런 험한 꼴을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진심을 털어놓자면 지금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줄지라도 너에게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잘 알아차려주었구나.” “아,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이 기쁨은 두 눈을 잃은 정도로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스승님과 저를 비탄에 빠뜨리고 불행을 맛보게 한 놈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승님의 얼굴을 망가뜨려 저를 힘들게 하려고 한 짓이라면 그 모습을 제가 안 보면 그만입니다. 저만 눈이 멀면 스승님의 그 사고는 없었던 일과 다름없어서 모처럼의 간계가 수포가 되어 필시 그놈의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지금 불행하기는커녕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비겁한 놈의 허를 찌르고 깜짝 놀라게 해주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스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맹인 사제는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p166)
나란히 장님이 된 사제지만, 여전히 사스케는 심지어 슌킨의 목욕까지 모든 시중을 들었다.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 사스케에는 더 큰 기쁨이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고집을 꺾은 슌킨과 달리, 사스케는 굳이 결혼을 거부할 정도로 슌킨에 대한 다른 관념에 빠져들었다.
“맹인의 몸을 맹인이 씻겨줄 때는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일까. 일찍이 슌킨이 손가락 끝으로 오래된 매화나무 가지를 쓰다듬은 것처럼 했을 터이지만, 손이 많이 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만사가 그런 식이라 대단히 까다로워서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용케도 잘해나가고 있구나’ 싶었지만, 당사자들은 이런 성가심을 즐기는 듯 말 한마디 없는 가운데 깊은 애정을 나누고 있었다. 짐작건대, 시력을 잃어버린 사랑하는 남녀가 촉감의 세계를 즐기는 정도는 우리의 상상을 불허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스케가 헌신적으로 슌킨을 모시고 슌킨 또한 흔쾌히 그 봉사를 요구하니 서로 싫증 낼 줄 몰랐던 것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p168~169)
“스승의 일을 물려받아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한 집안의 생계를 꾸려나간 사스케는 왜 정식으로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을까. 슌킨의 자존심이 이때까지도 결혼을 거부한 것일까. 데루가 사스케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로는, 슌킨 쪽은 꽤 고집을 꺾었지만 사스케는 그런 그녀 보기를 서글퍼했다고 한다. 슌킨을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맹인인 사스케는 현실의 눈을 감아버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관념의 경지로 비약했던 게 틀림없다. 그의 시야에는 과거 기억의 세계만 존재했다. 만일 슌킨이 사고로 성격이 변해버렸다면 그 사람은 이미 슌킨이 아니었다. 사스케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교만한 슌킨만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미모의 슌킨은 파괴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결혼을 원하지 않았던 이유는 슌킨보다 사스케 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p170)
사스케는 오히려 맹인이 되고 나서 새로운 경지에 나아갈 수 있었음을 강변한다. 스승 슌킨과의 관계에서도, 샤미센 소리에서도.
““누구든지 눈이 멀면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맹인이 되고 나서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구나. 오히려 반대로 이 세상이 극락정토極樂淨土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스승님과 단둘이 살아가면서 연화대蓮花臺 위에 사는 기분이었다. 눈이 멀고 나니 눈을 뜨고 있었을 때 보이지 않던 여러 가지가 보였기 때문이야. 스승님의 얼굴도 그 아름다움을 마음속 깊이 보게 된 것은 맹인이 되고 나서였어. 그 밖에 손발의 부드러움, 피부의 윤기, 목소리의 아름다움도 진정으로 잘 알게 되었단다. 눈이 밝았을 때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느끼지 못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특히 나는 스승님이 켜는 샤미센의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실명한 후에 비로소 음미할 수 있었어. 언제나 스승님은 이 방면의 천재라고 입으로는 말하고 있었지만 그제야 간신히 그 진가를 알게 되었구나. 미숙한 내 기량과는 너무나도 큰 격차가 있음에 새삼 놀라 ‘이제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니 이 얼마나 황송한 일인가’하고 내 어리석음을 반성하게 되었지. 그래서 나는 신령님이 다시 앞을 보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셔도 거절했을 것이야. 스승님도 나도 맹인이 되어서야 눈 뜬 자가 모르는 행복을 맛보게 되었단다.”” (p172)
병으로 슌킨이 세상을 뜨고, 다시 사스케는 20여년 이후 슌킨 기일에 세상을 뜬다. 사스케는 아들도 처첩도 없이 여생을 보냈고, 슌킨이라는 관념을 지켜냈다. 과연 두 사람의 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지, 두 사람의 감정과 고집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별개의 얘기다.
“덴코는 이 곡을 듣고 태어난 고향 계곡을 상상하며 넓디넓은 천지의 햇살을 그리워했겠지만, 정작 〈춘앵전〉을 타는 사스케의 넋은 어디로 달려갔을까? 촉각의 세계를 매개로 관념의 슌킨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진 그는 청각으로 그 부족함을 채웠던 것일까. 사람은 기억을 잃지 않는 한 꿈속에서 죽은 사람을 볼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상대를 꿈에서만 보았던 사스케는 언제 죽음으로 이별하였다고 확실하게 그 시기를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p175)
“추측건대, 이십일 년이나 고독하게 살아가는 동안 사스케는 생존할 때의 슌킨과는 완전히 다른 슌킨을 만들어냈고 더욱더 선명하게 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교토의 사찰 덴류지天竜時의 가잔오쇼峩山和尚(교토 출생의 승려로 덴류지 관장-옮긴이) 스님이 사스케가 스스로 눈을 찌른 이야기를 듣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사를 판가름하고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는 선기禅機(선의 수행으로 얻는 힘의 발현-옮긴이)를 칭찬하며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평했다고 한다. 독자께서는 수긍하실 수 있겠는가.”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