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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서 오히려 눈부신 인정 [가난한 사람들 –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0. 그래도 사랑할 만한 인간]

가난해서 오히려 눈부신 인정 [가난한 사람들 –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0. 그래도 사랑할 만한 인간]

굶주리는 삶 속에도 이웃을 염려하는 가난한 부부의 미덕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만도 동양에서는 이미 상당한 미덕美德이 된다. 그 뒤에 가난하면서 남을 도울 수 있으면 이는 도道와 닿아 있는 어떤 경지로 추켜세워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부의 아낙은 거창한 지각이나 자선 의식 없이 그런 경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남편은 성실한 어부이지만 그들 부부와 여러 아이들이 먹을 빵조차 넉넉하게 벌어들이지 못한다. 거기다가 남편은 방금도 목숨을 걸고 비바람 치는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그들의 정분으로 보아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이웃에 마음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린것 딸린 병든 이웃 과부를 끝내 잊지 못해 비바람을 헤치며 찾아본다.

남편도 선량함에서는 그런 아내에 뒤지지 않는다. 밤새 목숨을 걸고 배를 냈으나 허탕을 치고 돌아온 어부에게 온화함이나 인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아내로부터 불쌍하게 죽은 이웃 과부의 얘기를 듣자마자 당연한 듯 부모 없이 남겨진 어린것들을 데려다 돌볼 생각을 한다. 그가 짜증을 내는 것은 다만 머뭇거리는 아내에게일 뿐이다.

 

그림 1 위 작품이 수록된 ‘세기의 전설’ 1903년 발간 당시 책 삽화

 

원래 미발표 서사시 ‘여러 세기의 전설’ 중 일부

그런 그들 부부의 착한 심정이 말없는 일치로 드러날 때 우리가 받는 충격은 그 어떤 장엄한 비극성에 못지않다. 아주 어렸을 적에 읽은 작품이고, 그 뒤 다른 번역으로는 다시 대하지 못했는데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되는 까닭은 아마도 그 충격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원래 이 작품은 단편소설이 아니라 운문으로 쓰여진 일종의 서사시다. 위고의 ‘여러 세기의 전설’이라는 미발표 원고 중 일부라고 한다. 진형준 선생께 새로이 번역을 의뢰하면서 운문으로서는 최소한의 흔적만 남기고 되도록 단편소설에 가깝도록 윤문해주기를 당부했다.

19세기 弗 낭만주의 거두 빅토르 위고…’에르나니’ 논란으로 명성


작가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거두이다. ‘레 미제라블’과 ‘노트르담의 꼽추’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그는 이미 열일곱 살 때 평론지 ‘콩세르바퇴르 리테레르’를 창간했고 스무 살 때 처녀 시집 ‘송가와 기타 시’를 발표해 루이 18세로부터 연금을 받는 작가가 됐다. 그 뒤 소설가로 활동하며 낭만주의 작가들과 교류를 가지긴 했지만 위고가 철저한 낭만주의 작가로 태어난 것은 1829년 희곡 ‘리옹 드 르롬’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한 창녀가 사랑을 통해 순결을 회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이 검열에 걸려 상연 불가 처분이 내려지자 그가 당장 또 다른 희곡 ‘에르나니’를 써서 당시의 고전주의자들에게 응수한 것이다.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경의를 바치는 작품 ‘에르나니」를 둘러싸고 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 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싸움은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낭만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을 정점으로 고전주의는 퇴색하고 본격적인 낭만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절정기에 맞은 딸 죽음…‘레 미제라블’ 집필로 극복

‘에르나니’ 사건으로 명성을 얻은 위고는 이어 ‘노트르담의 꼽추’를 발표했고 시집 ‘황혼의 노래’ ‘가을의 나뭇잎’ ‘빛과 그림자’ 등을 출간했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인기도 얻고 여배우 쥘리에트 드루와의 연애로 들떠 있을 때 그의 딸 레오폴딘이 사고사하는 불행이 닥쳐왔다. 죄책감에 빠진 그는 한동안 작품에 손을 대지 못하다가 여러 편의 명상시를 쓰면서 슬픔을 추스렸다. 이어 새 소설을 집필하는 데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데 유명한 ‘레 미제라블’이 이때 쓰여진 작품이다.

벨기에 망명기에 발표된 방대한 작품 중 하나

나폴레옹 3세가 주도하는 제2제정이 수립되자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한 그는 20년간의 이국 생활 동안 방대한 양의 작품을 탈고했다. 정치적 공격성이 짙은 ‘징벌 시집’을 비롯해 ‘악마의 최후’ ‘신’ 등이 망명 생활 동안 나왔으며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된 ‘여러 세기의 전설’도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제2공화정이 몰락하고 제3공화정이 들어서자 오랜 동안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로 돌아와 잠시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던 그는 1872년 이후 다시 한적한 생활로 돌아가 자신의 창작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젊어서 대중 독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늙어서는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았던 위고는 죽은 후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를 가장 위대한 프랑스 시인으로 꼽느냐는 질문을 받았던 앙드레 지드가 ‘유감스럽지만 빅토르 위고’라고 답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위고를 의도적으로 폄하했던 시대에도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까지 훼손하지는 못했다.

 

 

 

*이 글은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0. 그래도 사랑할 만한 인간』에 담긴 이문열 작가의 해설을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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