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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위해 기쁘게 두 눈을 포기하는 마음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권 – 사랑의 여러 빛깔_슌킨이야기]

그녀를 위해 기쁘게 두 눈을 포기하는 마음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권 – 사랑의 여러 빛깔_슌킨이야기]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언뜻 무한 반복되는 이야기같지만, 어느 하나도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이유도 제각각입니다. 스스로에 결핍된 육체적, 지적, 미적, 물질적인 무엇에 대한 갑작스런 발견, 혹은 ‘상대적 박탈감’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소설은 여러 측면에서 층이 지는 두 사람, 특히 한 쪽의 경외감 가득한 사랑으로 지탱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무덤을 묘사하는 소설 도입부에서부터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슌킨의 묘 오른쪽에 소나무 한그루가 푸른 가지를 마치 지붕처럼 묘비 위로 드리웠고, 그 가지 끝이 닿지 않는 왼쪽으로 두세 자쯤(약 60~90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사스케의 묘가 황송해하며 모시듯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생전에 사스케가 충실하게 스승을 섬기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수행했던 때를 떠올리게 하며 자못 묘비 속에 혼령으로 남아 오늘날도 여전히 그 행복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시작노벨상 최종후보였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극단적 여성관

슌킨이야기」를 쓴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 문학계에서 독특한 위상을 가진 작가입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지명되며 최종 후보 5명에 포함되는 등 국내외에서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은 점도 그렇지만, 탐미주의·예술지상주의·악마주의로 요약되는 그의 작품들 때문입니다.

거기에 아내를 친구에게 양도한다는 합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고, 처제와 내연관계였고, 세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파격적인 사생활으로 큰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름답고 강인한 여성에 대한 경외심과도 같은 숭배, 가학적-피학적 묘사, 근친상간에 가까운 관계 설정이 빈번한 그의 문학적 성향은 이 작품 「슌킨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1933년 발표됐던 이 작품은 곧 1935년 영화로, 1975년에는 오페라로도 제작됩니다. 이후 1976년과 최근인 2008년 다시 영화화되기도 합니다.

슌킨이야기

나나 너희는 눈코가 있을 뿐우리들이야말로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공 슌킨은 부유한 약재상 집안 아가씨, 사스케는 거래처에서 온 가게 수습생입니다. 덧붙이자면 슌킨은 아홉 살에 시력을 잃었지만 고토와 샤미센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부유한 집안 형편과 음악적 재능, 미모가 ‘선물’이었다면, 실명은 그녀의 삶을 뒤틀어버린 재앙입니다. 반면 사스케는 형편이 넉넉치 않은 상인 집안에서 거래처에 위탁된 견습생, 사실상 ‘머슴살이’ 신세죠. 이미 첫눈에 반하다시피한 데다, 고토를 매개로 사제지간까지 맺으며 사스케에게 슌킨은 범접하기 힘든 경외의 대상이 됩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스승님의 얼굴을 보고 가엽다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네. 스승님에 비한다면 도리어 눈이 보이는 쪽이 더 비참하지. 스승님께서 저 기상과 용모로 무엇이 아쉬워 남의 동정을 구하시겠는가? 오히려 ‘사스케가 가여워’라고 하시며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어. 나나 너희는 눈코가 있을 뿐, 다른 것은 무엇 하나 스승님께 미치지 못한다. 우리들이야말로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나를 예전처럼 대할 수 있다면 장님이 되어도 좋다

옛말에 ‘건강이 1,000냥이라면 눈이 800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오감 중에서도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말입니다. 모든 판단에 있어서, 특히나 위험에 처했을 때의 대처에서 시각의 중요성은 청각이나 미각, 후각 등과 비교하기 어렵죠. 그런데 단지 사랑하는 이의 자존감을 위해 두 눈을 포기한다면 정말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스케는 이런 결심을 합니다.

슌킨이야기

앞서 설명했듯 슌킨은 어릴 적 이미 눈이 멀었지만,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타고난 음악적 재능까지 더해 고토와 샤미센 명인으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엄격하다 못해 가혹하기까지 한 당시의 도제식 수련방식에 더해 특유의 가학적인 체벌까지 서슴치 않던 그녀는 많은 이의 원한을 삽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중 한 명이 의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를 잃게 됩니다.

깊은 밤 그녀의 잠자리에 침입해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얼굴에 부어버린 겁니다. 슌킨은 평생 자신의 수발을 들어온 사스케에게도 그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하게 됐고, 이에 사스케는 결심합니다. 스승이 흉측해진 얼굴이 노출될까 불안하지 않게, 아예 자신이 볼 수 없는 방법을 찾은 겁니다.

“잘 결심해주었구나.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누구의 원한을 사서 이런 험한 꼴을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진심을 털어놓자면 지금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줄지라도 너에게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잘 알아차려 주었구나.”

“아,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이 기쁨은 두 눈을 잃은 정도로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스승님과 저를 비탄에 빠뜨리고 불행을 맛보게 한 놈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승님의 얼굴을 망가뜨려 저를 힘들게 하려고 한 짓이라면 그 모습을 제가 안 보면 그만입니다. 저만 눈이 멀면 스승님의 그 사고는 없었던 일과 다름없어서 모처럼의 간계가 수포가 되어 필시 그놈의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지금 불행하기는커녕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비겁한 놈의 허를 찌르고 깜짝 놀라게 해주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숭배에 가까운 관념적인 사랑눈 뜬 자가 모르는 행복을 맛보게 되었다

나란히 장님이 된 사제지만, 여전히 사스케는 심지어 슌킨의 목욕까지 모든 시중을 들며 함께 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에겐 더 큰 기쁨이 됩니다. 오히려 이제는 사스케는 굳이 슌킨과의 혼례를 거부할 정도로 슌킨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스승의 일을 물려받아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한 집안의 생계를 꾸려나간 사스케는 왜 정식으로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을까. 슌킨의 자존심이 이때까지도 결혼을 거부한 것일까. 데루가 사스케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로는, 슌킨 쪽은 꽤 고집을 꺾었지만 사스케는 그런 그녀 보기를 서글퍼했다고 한다. 슌킨을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맹인인 사스케는 현실의 눈을 감아버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관념의 경지로 비약했던 게 틀림없다. 그의 시야에는 과거 기억의 세계만 존재했다. 만일 슌킨이 사고로 성격이 변해버렸다면 그 사람은 이미 슌킨이 아니었다. 사스케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교만한 슌킨만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미모의 슌킨은 파괴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결혼을 원하지 않았던 이유는 슌킨보다 사스케 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스케는 오히려 맹인이 되고 나서 새로운 경지에 나아갈 수 있었음을 강변한다. 스승 슌킨과의 관계에서도, 샤미센 소리에서도. 이런 얘기가 극단적인 아집으로 들릴지, 아름다운 사랑으로 보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든지 눈이 멀면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맹인이 되고 나서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구나. 오히려 반대로 이 세상이 극락정토 (極樂淨土) 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스승님과 단둘이 살아가면서 연화대 (蓮花臺) 위에 사는 기분이었다. 눈이 멀고 나니 눈을 뜨고 있었을 때 보이지 않던 여러 가지가 보였기 때문이야. 스승님의 얼굴도 그 아름다움을 마음속 깊이 보게 된 것은 맹인이 되고 나서였어. 그 밖에 손발의 부드러움, 피부의 윤기, 목소리의 아름다움도 진정으로 잘 알게 되었단다.

눈이 밝았을 때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느끼지 못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특히 나는 스승님이 켜는 샤미센의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실명한 후에 비로소 음미할 수 있었어. 언제나 스승님은 이 방면의 천재라고 입으로는 말하고 있었지만 그제야 간신히 그 진가를 알게 되었구나. 미숙한 내 기량과는 너무나도 큰 격차가 있음에 새삼 놀라 ‘이제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니 이 얼마나 황송한 일인가’하고 내 어리석음을 반성하게 되었지. 그래서 나는 신령님이 다시 앞을 보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셔도 거절했을 것이야. 스승님도 나도 맹인이 되어서야 눈 뜬 자가 모르는 행복을 맛보게 되었단다.”

☞ 책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권 – 사랑의 여러 빛깔_슌킨 이야기」는

세계명작산책

1996년 처음 출간된 이래 20여 년간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이 새로운 판형과 현대적인 번역으로 다시 독자를 만납니다. 그간 변화해온 시대와 달라진 독서 지형을 반영해, 기존에 수록된 백여 편의 중단편 중 열두 편을 다른 작가 혹은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교체하고, 일본어 중역이 포함된 낡은 번역도 새로운 세대의 번역자들의 원전 번역으로 바꾸어 보다 현대적인 책으로 엮었습니다. 바뀌거나 더해진 것이 3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새로워진 개정판입니다.

엮은이인 이문열 작가는 초판 서문에서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속에 다양하면서도 잘 정리된 전범(典範)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 작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작품들의 목록을 추리고, 주제별로 세계의 다양한 나라의 작품들을 엮어내고 각 작품에 대한 해설까지 더했습니다. 모두를 납득시킬 만한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는 별수 없는 미진함이 남을지라도(혹은 그런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작가는 이 선집이 작가 자신의 문학 체험의 한 결산임을 분명히 밝히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학 체험이 독자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은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창작의 한 전범이자 기준이 될 것이며, 소설 연구자들에게는 주제별 비교가 가능한 텍스트로서, 그리고 대중 독자들에게는 수준 높은 세계명작들의 풍성한 세계를 접하는 첫 책으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수록된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높은 수준의 문학 교양을 쌓는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총 10권으로 기획된 시리즈 중 제1권 “사랑의 여러 빛깔”은 사랑의 본질 혹은 속성을 다룬 작품들을 모았습니다. 이번 슌킨 이야기에서의 사랑의 속성은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대상에 대한 충성심과도 비슷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흉하게 변한다고 한다 해서 그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본인의 눈을 실명시켜버리는 상황이 납득이 갈까요? 그러나 슌킨 이야기에서 사스케는 스승인 슌킨의 얼굴이 흉한 모습으로 변하자 그 이후의 얼굴을 보지 않고 영원히 그 이전의 모습만을 기억할 수 있게 본인의 눈을 실명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 후 단지 사랑의 감정 이상의 절대자를 숭배하는 것처럼 슌킨이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모시게 되는…그러한 다른 관념으로 슌킨을 바라보게 됩니다.

처음 책을 낼 때부터 꼭 넣고 싶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넣지 못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와 오 헨리의 <잊힌 결혼식>을 새로이 번역해 실었고, 테오도어 슈트롬의 <임멘 호수>와 안톤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여인>은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읽습니다. 그 외에도 바실리 악쇼노프의 <달로 가는 도중에>, 프랑수아 샤토브리앙의 <르네>,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 토머스 하디의 <환상을 쫓는 여인>, 알퐁스 도데의 <별>, 아니투어 슈니츨러의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스탕달의 <바니나 바니니> 같은 세계적 문호들의 정수를 새롭게 다듬은 문장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에서부터 치정 같은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를 만나볼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책 「이문열 세계명작산책_1권 사랑의 여러 빛깔_슌킨이야기」 가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조금 더 책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책 제목을 눌러 도서 상세페이지로 이동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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